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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없어서 구로공단까지 걸어 갔었지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C020103
한자 -九老工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철산1동·철산2동·철산3동·철산4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민성혜

[택시기사와 멱살잡이도 했어요]

1990년대 후반까지도 광명 시민이라면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오다가 시외 지역 요금 할증 문제로 택시 기사와 말다툼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광명시는 안양천·목감천이라는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행정 구역이 서울에서 경기도로 바뀐다. 그러나 서울 지역과 거의 같은 기간 시설을 이용하고 살아 왔기 때문에 평소에도 광명이 경기도 지역이란 점을 실감하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대부분이 서울로 출퇴근하던 광명 지역 사람들은 유독 택시만 광명을 시외 지역으로 적용하여 할증 요금을 요구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다툼을 자주 겪는 택시 기사들은 적당히 눈치로 할증 요금을 받거나 말거나 했지만, 이 지역 사정을 모르는 택시 기사들과 시민들과의 다툼은 1999년 7월 1일 광명시와 구로·금천구 간의 택시사업구역통합제도가 실시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교통의 오지였던 철산리]

1970년대 시흥군 서면광명리철산리를 포함한 광명출장소 지역이 토지 구획 정리 사업으로 급격히 주택지로 개발되고 소하동학온동 지역이 개발 제한 구역으로 설정되기 전까지 광명 지역의 중심지는 소하동이었다.

2010년 현재 소하2동주민센터가 자리한 설월리는 1914년 이후 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 학교가 있는 서면의 중심지였기에, 서면의 모든 교통로는 설월리로 향해 있었다. 반면 외부로 향하는 교통로는 권역별로 달랐다. 학온동 지역은 안양, 소하동 지역은 금천구 시흥동과 안양, 광명과 옥길 지역은 오류동과 영등포·소래가 생활권이어서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도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 중 철산리 지역은 동으로는 안양천, 북쪽 광명 방향으로는 석고개, 남쪽의 하안·소하 방향으로는 철미고개[일명 안현고개], 서쪽은 도덕산으로 막혀 있는 교통의 오지였다. 당시 철산리에서 구로·영등포 지역으로 나가던 유일한 교통로는 안양천을 건너는 뱀수다리[일명 뱀쇠다리]였다.

뱀수다리철산리에서 재배한 참외와 배추 같은 채소를 영등포로 실어 나르던 길목이기도 했고, 참외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뱀수다리는 지금의 뱀수다리와 달리 안양천 뚝방에서부터 걸쳐진 형태였다고 한다.

광명 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 화영운수의 연혁에 따르면, 1973년부터 광명~안양 간 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고, 1979년 12월 10일 평안운수에서 화영운수가 분리 독립한 후 개봉역~광명리~철산5리인 ‘뚝말[안양천 뚝방길]’까지 4대의 버스를 운행했다고 한다. 따라서 1982년 5월 광명동철산대교를 잇는 광덕로가 개통되고 시청사가 들어서기 전까지 철산동에는 변변한 도로가 없어서 농로나 산길, 오솔길을 이용해 외부로 오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장기상[1941년생] 씨가 서면 지역의 우편배달을 위해 사용했던 지도를 보면, 철산리에는 산지와 밭만 보일 뿐 자동차가 다닐 만한 도로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출근길]

철산동의 교통 문제는 도로나 교량과 같은 인구 증가를 대비한 시설을 먼저 마련하지 않고 대단위 아파트를 조성했기에 일어난 문제였다. 이런 이유로 당시 대부분 직장을 서울에 두고 있던 시민들의 출근 모습은 그야말로 전쟁과 같았다. 1981년 철산동의 교통 문제를 보도했던 신문 기사에 의하면, 철산3동철산4동, 하안동의 3만여 주민들은 철산-구로역-영등포-해태제과 앞을 다니던 보영운수 115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거나, 철산교를 넘어서 구로3공단까지 2㎞를 걸어 나가 110번 버스를 타고 다시 서울역-서울운동장-청량리-쌍문동으로 운행하는 26번으로 갈아타야 했다.

철산동하안동 주민의 80%가 서울에 직장을 두고 서울 중심부로 출퇴근했기 때문에 중앙청[현 경복궁]과 시청 방면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가 필요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광명시는 이렇듯 심각한 교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 지역의 버스 노선을 광명시내로 끌어들이고, 광명시내 전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개설하여 관내 버스를 운행하게 하는 등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게 되었다.

1984년에 광명시내버스가 개통, 운행된 것은, 광명시의 동부 지역인 시흥군 서면과 서부 지역인 남면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합으로 시흥군 서면이 된 이후 명실공히 최초로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소하동 주민들이 광명동에 있던 시청에 가기 위해 영등포까지 나가서 버스를 타고 개봉동을 거쳐서 광명으로 들어오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산대교 사거리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지하 차도 건설을 반대하면서 개통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철산지하차도가 건설될 때까지 악명 높은 병목 도로였다. 계속되는 인구 증가와 우회 도로가 없는 철산동의 교통 대란은 지하철 7호선 철산역이 개통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철산구도로 이야기]

산비탈을 따라 논두렁 밭두렁이 이어진 길을, 할아버지가 삼아 준 짚신이 헤질 정도로 먼 시간을 걸어서 서면초등학교까지 다녀야 했던 철산동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철산구도로’로 불리던 철산3동철산4동의 경계를 지나는 길이 비좁고 구불구불한 길처럼 보이지만, 광명·천왕-시청 앞-철산대교를 잇는 광덕로[오리로디지털로로 나뉘어 명칭이 바뀌면서 광덕로라는 이름은 사라짐]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철산리의 중심 도로였다. 따라서 ‘구도로’라는 이름도 ‘광덕로’가 중심 도로가 되면서 자연스레 불리게 된 것이다. 철산구도로는 광명시의 시내버스 개통을 위해 하안동-소하동-일직동까지 연장되었다.

하안동철산동 토박이인 정운교 씨와 장광진 씨에 의하면, 철산리에 초등학교[현 광명광덕초등학교]를 짓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학교 터를 선정했다고 한다. 그 땅은 당시 지역 유지였던 장세일 씨의 소유였는데, 학교 설립을 위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학교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이장 세 명이 찾아가 땅을 희사해 줄 것을 간청했고, 다행히 장세일 씨가 이를 받아들여 서면초등학교 철산분교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축 과정에서 차량 진입과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학교까지 길을 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때 차량 운행을 위한 길을 확보하기 위해 장세일 씨가 다시 땅을 내놓아 만들어진 길이 지금은 ‘도덕산공원로’로 이름이 바뀐 ‘철산구도로’이다.

철산구도로뿐만 아니라 철산3동 한신아파트에서 철산3동 우체국과 제일은행을 연결하던 복개천길과 광덕산 뒷길[2010년 현재 하안로~광덕산로]도 철산동 주민들이 돈을 모아 땅을 사고 큰 홈통 3개를 놓아서 차가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직선화된 넓고 큰 길이 새로 만들어지면 옛 이야기가 담긴 길들은 작은 길로 변하여 불편해지다가 그만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산비탈의 꼬부랑길과 개천 변의 볼품없이 작은 그 길이 1960년 무렵 철산리 주민들이 지역 발전의 염원을 담아 지역 유지가 땅을 내놓고 주민들이 함께 기금을 내어 만들어진 길이었음을 기억해 보자. 불편은 잠시 접어 두고 철산동의 역사가 있는 길을 걷고 있다는 작은 여유를 부리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정보제공]

  • •  장기상(남, 1941년생, 전 광명우체국 집배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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