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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의 안식처에서 역사를 생각한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B020204
한자 愍懷嬪-安息處-歷史-
지역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 능말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민회빈 강씨의 숨결이 살아 있는 영회원]

아방리[능말]라는 지명은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1611~1646]의 능인 영회원에서 유래한다. 영회원은 마을 동쪽의 애기능저수지를 지나 구름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에서는 직선으로 1.16㎞ 거리에 있다.

애기능저수지를 돌아 올라가서 광명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앞을 지나 산비탈에 마을을 내려다보듯 위치해 있는 영회원에 다다른다.

영회원에서 지척에 있는 기와집골 자신의 친정 마을에서 죽음을 맞이한 민회빈 강씨는 죽어서도 그렇듯 친정 마을을 떠나지 못했다.

지금은 웅장한 묘봉과 석물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가 사사되던 당시에는 겨우 시신만을 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친족들이 멸족되거나 몰래 도망을 가야 했던 암울한 시대를 겪으며, 그의 무덤은 물론 친정 집안의 선산조차 신원이 회복되던 숙종 때까지 일체 출입이 금지되었다.

[억울한 삶을 살다 가다]

민회빈 강씨는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 강석기의 5남 3녀 중 둘째 딸로 1627년(인조 5)에 세자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그러나 민회빈 강씨는 병자호란 후 1637년(인조 15)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인조 22) 1월에 잠시 귀국을 하였다. 아버지 강석기의 부음을 받고 조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인조민회빈 강씨가 친정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민회빈 강씨는 심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현세자민회빈 강씨는 청나라에서 조선 사람들을 위해 갖은 애를 쓰고 발달된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행동이 인조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그리고 훗날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후 어선(御膳)[왕이 먹는 음식]에 독약을 넣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김자점인조의 총비(寵妃) 조소용이 민회빈 강씨에게 누명을 씌웠다. 결국 민회빈 강씨는 후원 별당에 유폐되었다가 친정으로 내쫓겼으며, 1646년(인조 24) 3월 15일에 사사(賜死)되었다.

이 ‘강빈의 옥(獄)’으로 인해 친정어머니 신씨(申氏)와 형제 네 명, 시중을 들던 노비 네 명이 장살(杖殺)되고, 이미 죽은 아버지 강석기의 관직도 삭탈되었다. 그리고 어린 세 아들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두 아들은 병으로 죽었다.

1718년(숙종 44)에 민회빈 강씨의 억울함이 밝혀져 복위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어 세자빈의 묘소를 개봉(改封)하는 대규모의 역사(役事)를 진행하여 세자의 신주(神主)와 합봉하였고, 1903년(고종 7)에는 묘를 ‘영회원(永懷園)’으로 개칭했다. 영회원의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고, 봉분의 좌우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석호(石虎)가 배열되어 있다.

주민들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재실이 있었다고 하나 이후 소실되었다고 한다. 불과 몇 십 년 전이지만 그 시절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여 복원 계획을 세우지 못했는데, 다행히 최근 광명시에서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역사의 거울이 된 영회원]

‘능촌’, ‘능말’, ‘아방리’ 등과 같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민회빈 강씨의 묘소가 이 지역 주민들과 얼마만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한때는 그녀로 인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숨어야 했을 때 민회빈 강씨의 무덤은 그들의 슬픈 운명과도 같았다.

민회빈 강씨가 복권되면서 영광스런 세자빈의 무덤으로 자리할 때는 주민들은 지역 사회의 자랑거리로 여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비운의 세자빈이라는 애잔하고 슬픈 사연이 영회원과 함께하며 지역민의 마음 한구석에도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아방리[능말]를 찾는 나그네에게도 찡한 마음, 정말 안타깝다는 생각이 앞선다.

민회빈 강씨는 시대의 선각자였다.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고 울었던 여인이자, 농지를 개척하고 상업에 힘써 그 돈으로 노예 생활을 하던 조선 사람을 구출했던 여장부이기도 했다. 그녀가 돌아올 때 얼마나 많은 조선 사람들이 다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똥말똥하여라.”라고 울부짖던 사람이 오직 예조판서 김상현뿐이었겠는가. 당시 청나라로 끌려가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천신만고 끝에 데리고 온 것도 그녀였다. 또한 새로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니라 질시와 미움이었다. 결국 인조는 며느리와 자신의 어린 손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며느리의 집안을 멸족시켰다. 참담한 역사와 무능한 시대의 책임을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고자 했던 국왕 인조에겐 자식과 며느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당시 청나라에서 돌아온 ‘환향녀’들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고 손가락질을 당했는가. 그들 또한 민회빈 강씨의 비극과 다를 바 없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어린 조선의 여인들은 왜놈들의 성노리개가 되었으며,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고향 마을에서조차 쫓겨나 과거를 숨기고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 했다. 참담한 역사는 그렇게 늘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생을 전가시킨다. 오늘날에도 힘없는 사람들이 첫 번째 희생자가 된다. 경제가 어려울 때도 그 직격탄을 맞는 건 서민의 몫이다. 스스로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들, 지금도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흔한가. 그런 사람들에게 희생된 비운의 영웅들, 그래서 늘 영회원을 찾을 때마다 뭔가 모를 안타까움이 가슴을 짓누른다. 역사는 오늘과 내일의 거울이 아니겠는가.

[정보제공]

  • •  강진근(남, 1938년생, 노온사동 주민, 금천강씨 종친회 고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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