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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1711
한자 李元翼
영어의미역 Yi Wonik
이칭/별칭 공려(公勵),오리(梧里),문충(文忠),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철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생년 1547년연표보기
몰년 1634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 이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함천군 이억재(李億載)이다. 이원익의 가계는 익녕군 이치-수천군 이정은-청기군 이표-함천군 이억재-이원익으로 이어진다.

[활동사항]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1573년(선조 6)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그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이이(李珥)에게 인정받아 여러 차례 중앙 관직에 천거되었다. 1575년(선조 8) 가을 사간원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 사헌부지평·사헌부헌납·사헌부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7년(선조 20)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이때 양곡 1만여 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 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제도를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줄인 조치였다.

안주 지방에서는 뽕을 심어 누에를 칠 줄 몰랐는데, 이원익이 권장하여 이공상(李公桑)[이원익에 의하여 계발된 잠상(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 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사헌부대사헌·호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겸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하였고,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겸순찰사가 되어 평양성 인근에서 왜군에게 공격을 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1595년(선조 28) 우의정겸사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며, 주로 경상북도 성주에 설치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 시기에는 구미의 금오산성, 창녕의 화왕산성, 함양의 황석산성 등 영남 지역의 산성을 수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곽재우(郭再祐) 등의 의병장과 교류하며 영남 지역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도 긴밀히 협조하여 한산도에 주둔하던 부대를 격려하여 사기를 올리는 데 힘썼으며, 이순신이 파면되자 적극 옹호하여 다시 천거되는 데 기여하였다. 1599년(선조 32) 영의정이 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사직하고 도성을 떠나 소하리 선산으로 물러났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하여 경기도 지방에 한하여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내도록 하였다. 임해군(臨海君)이 처형되고 대비 폐위론이 나오자 반대 상소문을 올려 1615년(광해군 7) 결국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으며 73세이던 1619년(광해군 11) 풀려나 여주에서 머물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반정으로 성내의 민심이 불안하였는데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되자 안정되었다. 한편,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여 유배지에 머물게 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하였으며, 서울로 환도한 뒤 훈련도감제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쇠하여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원익은 성품이 소박하여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고 한다. 1623년(인조 1) 9월 인조가 77세 되는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궤장을 하사하고 잔치를 열어 주었으며, 1631년(인조 9) 초가로 된 거처의 누추함을 보고 정당을 하사하여 내려 주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받았다.

이원익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한양의 여러 곳에 거처하였으나, 물러나서는 오늘날의 광명시 소하동 선산이 있는 오리곡 인근에 머물렀다. 이원익의 호를 딴 오리(梧里)는 현재 광명시 소하동에서 가학동으로 넘어가는 곳의 이름으로 이원익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옛 지도인 「군부인조씨이하십삼세족장분산도(郡夫人趙氏以下十三世族葬墳山圖)」에도 지명이 나온다. 또한 소하동 설월리[또는 서월리(鋤月里)]는 구전에 따르면, 이원익이 달빛 아래 호미로 김을 매던 곳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이원익의 영정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인조가 하사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불탄 것을 다시 복원한 관감당(觀感堂)을 비롯하여 이원익 묘소 및 신도비 등이 남아 선생의 정신을 전하고 있다.

[학문과 사상]

이원익은 공리공론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으로 정치 및 행정에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같은 사상은 최초로 대동법 시행을 정책적으로 실현한 면모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에게 내려준 지침에는 마음가짐을 비롯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방법,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등 실질을 숭상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유서를 비롯한 유훈에는 풍수설에 구애받지 말고 소하동 선산에 안장할 것을 당부하였고, 재물로 가족들이 화목하지 못함을 경계하여 불의한 재물을 모으지 말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 『속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소하동 1059-9번지[오리로 325]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1년(선조 34) 청백리에 천거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되었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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