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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530
한자 李義傳
영어음역 Yi Uijeon
이칭/별칭 완선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지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성별
생년 1568년연표보기
몰년 1647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대표관직 이천부사

[정의]

조선 후기 광명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의중(宜仲). 할아버지는 함천군(咸川君) 이억재(李億載)이고, 아버지는 상국문충공(相國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다. 어머니는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이의전(李義傳)[1568~1647]은 1599년(선조 32) 31세 때 비로소 벼슬에 나가 4현(四縣), 5군(五郡), 2부(二府)의 목민관으로 전후 열한 차례의 외직을 지냈다. 주로 경기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양근군수(楊根郡守)로 재직할 때는 업적이 으뜸으로 평가되어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재임(再任)하였다.

[학문과 사상]

아버지의 “청렴하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밝게 된다[廉則公公則明]”, “인민 애물의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爲政以仁民愛物爲心]”, “호령을 고르게 하고 상벌에 사사로움이 없으면 백성은 순종한다[號令平而賞罰無私則民服]”, “민심이 흩어지면 만사를 그르친다[民心散則萬事非]”라는 훈계를 체득하여 실천해 지방관 시절 명성과 공적이 높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경기 지방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 이의전이 염혜(廉惠)하고 민심을 수습할 수 있다 하여 가평의 목민관을 명하였다. 이러한 행적을 살펴볼 때 선친의 유지도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목민관의 참된 자세를 익혀 몸소 행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소하동에 있으며, 1647년(인조 25)에 세워진 비문은 허목이 글을 짓고 유하익이 판서하였다.

[상훈과 추모]

병자호란 당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간 공로로 가선대부에 올랐고, 완선군(完善君)에 봉해졌다. 70세에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에 들었으며, 1647년(인조 25) 80세의 수구(壽耉)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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