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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488
한자 集姓村
영어의미역 Single-Clan Village
이칭/별칭 동성마을,동족마을,동족부락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집필자 권만용

[정의]

경기도 광명시에서 동성동본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

[개설]

집성촌은 우리나라 전통 사회의 한 특징으로 동성동본의 성씨 집단이 대대로 함께 모여 사는 촌락을 말한다. 집성촌이 형성된 시기는 삼국시대 또는 고려시대로 보기도 하지만, 조선 전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7세기 이후에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집성촌의 형성은 가족 제도와 친족의 범위, 혼인, 상속 제도와 관련이 있다. 16세기 이전까지는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으므로 재산도 자녀 균등 상속을 원칙으로 하였다. 부모의 제사도 자녀들이 윤회 봉사하였다. 또한 결혼한 후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사위가 처가의 터전을 이어받는 경우와 외손봉사도 흔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이 17세기부터 무너지면서 종법적인 가족 질서로의 변화와 함께 상속제도 또한 적장자 중심의 차등 상속으로 변화하였다. 결국 가부장적인 친족 체제로의 변화, 상속 제도의 변동, 문중 의식의 대두 등이 집성촌 형성을 가속화시킨 주된 원인이 되었다.

집성촌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한 동족이 어느 한 마을에 계속해서 여러 대에 걸쳐서 거주하는 경우와, 자기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새 마을을 구성하고 후손들이 그 마을을 계속해서 발전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을의 제반 행사에 모두가 힘을 합하고, 향촌 사회의 노동 집약적인 일들도 자발적으로 상부상조하며 해결한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동족 마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1930년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집성촌의 경우 도별로는 경기도가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다음으로 많으며, 경기도에서는 현 광명시가 속했던 시흥군이 32개 마을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평, 파주, 김포 다음이었다. 광명시는 삼국시대 이래 독자적인 군현 체제를 유지했던 금천(衿川)과 과천(果川), 안산(案山) 지역을 포괄했던 시흥군의 일부 지역이었다.

[현황]

광명시에 집성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약 600년 전 금천강씨가 세거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광산김씨, 김녕김씨, 김해김씨, 순창설씨, 파주염씨, 무송윤씨, 광주이씨, 덕수장씨, 충주평씨, 광주안씨, 여흥민씨, 남양홍씨, 능성구씨, 전주이씨, 상주이씨, 경주최씨, 전주최씨, 진주유씨, 청송심씨, 초계정씨, 안동권씨, 수원백씨, 창녕성씨, 밀양손씨 등이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광명시에 집성촌이 형성된 지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광명동

너부대[광화대리(廣火大里)]에는 현재도 광주안씨·배천조씨·신안주씨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 중 가장 번창한 성씨는 광주안씨 감찰공파 후손이다. 새터말[신기촌]은 일제강점기 초기 광산김씨와 남양홍씨, 원주이씨 등이 정착해 살면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철산동

모세[연서(淵西)]에 처음 정착한 성씨는 여흥민씨로, 한때 ‘민씨촌’으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이후 남양홍씨와 순흥안씨 등이 들어와 살았는데, 1970년대 말 도시 계획으로 마을이 없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현충탑공원이 들어선 자리가 여흥민씨 선산이었다.

뱀수[사성리(巳省里)]에 세거한 성씨는 남양홍씨와 능성구씨이다. 해방 직후에는 30여 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1963년 서울시 도시 계획 구역에 편입된 후 광복아파트와 우성아파트 등 대단위 아파트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늘어났다.

쇠머리마을[원철산(元鐵山), 우두리(牛頭里), 우수리(牛首里), 철두리(鐵頭里)]에 처음 정착한 성씨는 덕수장씨 11세손인 장준(張埈)이다. 본래는 고양 행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분전하다 순국하여 가세가 기울자 이곳으로 이주해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살면서 취락이 형성되어 번성하였다.

3. 하안동

갠이불[가림동]은 현재 하안주공아파트 5단지가 있는 지역으로 연일정씨가 세거하고 있다. 금당마을[금당, 금당리, 금당곡, 금뎅이]에는 남양홍씨 선현 묘가 있다. 밤일은 밤나무가 많아서 유래된 지명으로, 충주평씨가 들어온 이래 충주박씨와 전주이씨가 들어와 살았는데, 비교적 충주평씨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안터마을은 1506년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 2등에 올라 운수군에 봉해진 이효성(李孝誠)[1445~1517]의 묘를 마을 뒤에 쓴 후 그의 후손들이 묘 아래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라고 전한다. 이후 달성서씨, 원주안씨, 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호수가 늘어났다.

안현은 현재 하안동 단독 필지와 광명시 실내체육관과 종합운동장이 있는 지역으로 하안1동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세거한 성씨는 전주이씨, 진주강씨, 평산신씨, 경주최씨 등이다. 가구 수가 50~60호에 이르렀으나, 1988년 도시화로 예전의 마을이 없어졌다.

4. 소하동

설월리[서러리, 큰말]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전주최씨를 비롯하여 진주유씨, 광산김씨로 알려지고 있다. 1919년 3월 27일 광명 지역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최주환, 유지호, 최호천, 최정성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영당말은 태종의 손자인 익녕군의 부인 평양조씨의 묘를 마을 뒤[소하동 산137번지]에 쓴 후 그 후손들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까지 마을에는 전주이씨 익녕군파만 살아서 인근에서는 이 마을을 ‘이씨촌’으로 부르기도 했다.

5. 일직동

구석말영당말에 살던 초계정씨가 분가하여 후에 취락이 형성된 마을이다. 궁말[궁촌(宮村)]은 조선 후기 소하동 영당말에 있던 전주이씨 익녕군파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덕안(德岸)에 최초로 정착한 성씨는 전주이씨 익녕군파로 알려지고 있다. 소하동 영당말에 살던 익녕군의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70동마을과 이 마을 뒷산인 일직동 산12-5번지에 5세손인 이성전(李性傳)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조 대부터 그의 후손들이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동촌(東村)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남원양씨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전주최씨, 안동권씨 등이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다. 모텡이[모테이]는 고속철도 광명역사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마을이다. 조선 후기에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李厚源)[1598~1660)의 묘를 삼석산[일명 서독산] 중턱에 쓴 후 그의 후손[전주이씨 광평대군파]들이 묘 아래 호봉골에 살다가 분가하여 터를 잡고 살면서 생긴 마을이다. 이후 남양홍씨, 상주이씨 등이 세거했다.

양진말[양달말, 양지말]에 오랫동안 세거한 성씨는 초계정씨, 안동권씨, 전주이씨라고 알려져 있다. 자경마을[자경리(自京里·自警里·自敬里)]은 광산김씨 직장공파가 처음 살기 시작한 이래 전주이씨 광평대군파와 양녕대군파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마을의 주산인 성재산은 광산김씨 사패지로 광산김씨 선현 묘들이 있다.

호봉골[호봉곡(虎鳳谷·虎峰谷)]은 1657년(효종 8)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李厚源)[1598~1660]의 묘를 삼석산 중턱에 쓴 후 그의 후손[전주이씨 광평대군파]들이 묘 아래에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삼석산에는 이직을 비롯한 이후원의 후손의 묘가 있고,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운 무의공 이순신(李純信)의 묘도 있다.

6. 가학동

가골[원가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로 추측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옥천부원군에 봉해진 설계조(薛繼祖)[1418~1486]의 후손들이 시흥시 군자동에서 살다가 조선 후기에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후 평양조씨, 밀양박씨, 전주이씨 등이 세거해 살았으나 집성을 이룬 것은 순창설씨다. 1943년 설계조를 모신 사당인 경모재가 개축되어 있다. 경모재에는 설계조의 영정과 칼 등이 보관되어 있다고 전한다.

가재골은 해방 후 공석골에 살던 창녕성씨가 분가를 해서 살기 시작한 마을이다. 공석골[공세동, 유등리]은 조선 후기 문화유씨가 정착한 마을이다. 문화유씨 족보에 따르면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의 고손 유성귀[1620-1671]의 묘를 쓴 후, 그 후손들이 이 묘 아래 집성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 창녕성씨가 집성을 이루어 인근 지역까지 크게 번성하였다.

노실리[노온곡, 노온곡리, 장곡리]에는 현재 김녕김씨가 30호 정도 살고 있다. 또한 경주김씨가 5호 정도, 그리고 나머지 성씨가 4~5호 가구 살고 있다고 한다.

도고내[道高川]는 시흥시 거멀 출신의 이봉익[광주이씨 11세손으로 달성현감을 역임함]이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 죽자 이곳에 묘를 쓴 후, 그 후손들이 묘 아래에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후에 수원백씨 등이 들어와 함께 살았다.

뒷골공석골에 살던 창녕성씨가 번성하여 분가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배의 형국이어서 호수가 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묘소 앞에 비석과 망주석, 석물 등을 세우지 못한다고 전해진다. 서독산 아래 성하경의 묘가 있다. 현재 창녕성씨가 4호 정도 남아 있다.

벌말에는 최초로 세거한 밀양손씨가 비교적 많이 살고 있다. 장터말에 처음 세거한 성씨는 파주염씨였다고 한다. 집성 역시 파주염씨이다. 2006년까지는 10여 호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2호 정도로 줄었다.

7. 노온사동

가락골에 처음 들어온 성씨는 전주이씨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분성김씨가 살기 시작했는데, 전주이씨는 대부분 마을을 떠났다고 한다. 가운데말[중촌(中村)]은 선릉참봉을 역임한 금천강씨의 후손들이 처음 터를 잡고 들어와 살았다. 이후 김해김씨, 남원양씨 등이 들어와 살았으나 금천강씨가 비교적 많이 살았다.

금천강씨강석기의 둘째딸이자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민회빈 강씨가 사사된 후 대대적인 멸족의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금천강씨의 여종이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충청도 어느 산골로 피신해서 은거해 살다가 성장하자 선조의 유택이 있는 능말[아왕리, 앙왜, 아방리]에 정착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갓난아이가 후에 선릉참봉을 역임한 강봉서[1605~1682]이다. 강봉서가 죽자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기 시작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새터말가운데말 등으로 후손들이 분가해 살면서 이 일대에서 번성하였다. 광명시를 비롯해 한강 이남 지역에 번성한 금천강씨 후손들은 대부분 강봉서의 후손들로 알려져 있다.

사들김해김씨 안경공파를 비롯하여 연일정씨, 전주이씨, 동래정씨 등이 비교적 오랫동안 살았다고 한다. 새터말은 능촌에 살던 금천강씨 강봉서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 분가하여 모여 살면서 생겨난 마을로, 현재도 금천강씨들이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아랫장절리에 최초로 들어온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전주이씨와 하동정씨가 오랫동안 살아왔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집성촌의 형성은 우리나라 사회가 혈연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한 데서 오는 유습이다. 또한 유교 문화권이라는 특수성에 따라 여러 가지 유교적 행사에 종족 모두가 힘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집성촌의 형성은 종가(宗家)를 중심으로 한 지나친 위계 의식의 강조, 자신의 가문만을 중시하는 데서 오는 배타성, 지나친 혈연 중시 등으로 때때로 사회 발전에 저해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사회가 급속하게 변하면서 집성촌이 해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광명 지역의 집성촌 역시 대규모 택지 조성과 교통의 발달 등으로 마을이 사라진 경우도 많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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